[군견조] 할로윈에는 호박을, 장난에는 복수를
할로윈 맞이 연성 ㅇㅅㅇ)/
군견조가 할로윈을 잘 보내길 바라며 오늘도 8뎀, 10뎀, 12뎀을 쳐맞고 온 에바리스트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 적당히 쳐맞고 들어와라 진짜
시월의 마지막 날 밤 하루 전 날의 저택은 깊은 적막에 빠져 있었다. 간간히 나무가 타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는 거실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따라서 쇼파에 앉은 아이자크는 따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창 밖을 응시했다. 실체가 아닌 가상의 세계인 성유계에도 낮과 밤은 찾아왔고 지금 저택의 밖은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즉 할 게 없다는 소리였다. 내려다본 군화는 이미 한 번 닦은 덕분에 반질반질하게 광이 나는 상태였고, 에바와 대화를 하자니 독서 삼매경이라 건드릴 수도 없다. 이에 아이자크는 대놓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할로윈인데 뭔가 이벤트라도 열어볼까요, 아가씨?”
벽난로 옆 흔들의자에 앉아 묵묵히 책장을 넘기던 인형에게 다가간 브라우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늘 그렇듯 무표정과 무뚝뚝함을 유지하던 인형은 그 말에 고개를 들며 입을 벌렸으나, 말을 받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내일이 할로윈이라고?”
“오늘이 10월 30일이니까, 아마 그렇겠지.”
인형과 마찬가지로 책을 쥔 채 조용히 앉아있던 에바리스트가 약간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자, 방금 전까지 나 죽겠소 하는 얼굴로 창 밖만 바라보던 아이자크는 늘어져있던 자세를 후닥닥 고쳐앉았다. 지루하고 따분하던 얼굴은 간 데 없고 활기만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걸 본 인형이 브라우에게 속삭였다.
“뭔가 준비하는 게 좋겠어.”
“..할로윈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놀라움을 이기지 못한 아이자크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자 에바리스트가 거의 보이지 않을 듯 미세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일반적으로는 실례된다고 판단되고도 남을 법한 그 말은 아이자크와 에바리스트에겐 공통된 의문이었는데, 그건 지시자라고 불리는 인형이 평소에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다. 상식의 부재가 의심되는 행동도 몇 번 저지른데다가, 하는 말이라고는 ‘저와 동행해주세요’, ‘마물이 나타났으니 물리쳐주세요’, ‘앞으로 나아가죠’,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따위의 딱딱한 말 밖에 없으니 그들로서는 지시자가 저 말만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된 기계가 아닌가 의심스럽던 찰나 저런 발언이 떨어졌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인형은 그런 그들의 사정 따위는 알지 못했기에 아이자크를 바라보았다. 화라도 내려는 건지 입술도 달싹이지 않은 채로,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아이자크를 가만히 응시하던 인형은 곧 뭔가를 결심한 듯 책장을 덮으며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할로윈은 매년 10월 31일 현세의 그리소도교 축일인 만성절 전날 다양한 복장을 갖춰입고 벌이는 축제로 아이들은 괴물이나 마녀, 유령 따위로 분장한 채 이웃집을 찾아다니며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을 외치며 사탕과 초콜릿 등을…”
“알았어, 잘 알고 있는 거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막힘없이 속사포처럼 할로윈에 대한 설명을 줄줄 읊어대던 인형의 말문을 잘라 틀어막은 것은 아이자크였다.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말하는 게 그대로 뒀다간 할로윈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강의라도 진행할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어렵지 않게 상상되는 바람에 아이자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놀란 것은 지시자의 옆에 선 브라우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인형이 말하는 내내 금빛 눈만 연신 깜빡거리던 브라우는 아이자크가 인형의 말문을 틀어막은 뒤에도 아무 말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잘하셨다며 매우 난감한 어조로 칭찬을 남겼고, 이내 그 말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살얼음을 밟고 디딘 듯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브라우는 곧 큼, 하고 작게 헛기침을 한 후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어떤 이벤트를…”
“…미안하지만 난 먼저 자러 가보겠다. 모두 늦기 전에 자도록.”
그렇게 브라우의 시도는 빛을 보기도 전에 꺾였다. 약간 날이 선 목소리와 함께 탁 소리나게 책을 덮은 에바리스트가 쌩하니 마루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나자, 남겨진 어콜라이트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몇 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만히 책만 읽던 상대가 갑자기 일어서서 올라가버리니 누구라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브라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아이자크와 무표정한 인형을 번갈아보다가 몹시 황망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 됐어. 에바는 원래 할로윈을 싫어하거든. 정확하게 말하면 안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그 말에 가까스로 진정한 아이자크가 답했다. 아무래도 참던 것이 웃음이었던 듯, 아이자크의 목소리에서 웃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앞서 브라우가 그랬던 것처럼 큼, 큼하고 몇 번 헛기침을 한 아이자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쭉 빼 2층을 보았다. 굳게 닫힌 문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치 감시라도 하는 듯한 상황에 브라우의 고개가 저절로 2층을 향했다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아이자크의 목소리에 의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보다 그 이벤트 말이야,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재료가 좀 필요할 것 같긴 하지만. 아, 어차피 저택 내부에 잭 오 랜턴 정도는 장식할 테니까 상관은 없나?”
“어떤 재료입니까?”
“그게 말이지…”
의아해하는 브라우를 보며 씨익 웃어보인 아이자크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호박, 좋아해?”
◇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소리는 틀림없이 아이자크의 음성이었다. 에바, 일어나. 목소리는 몇 번이나 그렇게 속삭였다. 그러나 무의식에 잠긴 채 모든 것을 꿈결이라고 생각했던 에바리스트는 결국 참다 못한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듯한 감각을 여러 번 맛 보고 나서야 힘겹게 눈을 떴다. 어깨를 잡은 손 위로 시선을 올리자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자크….”
“일어나, 아침 먹으래.”
깊은 잠 덕분에 푹 잠겨 형편없는 목소리였건만 아이자크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을 맞은 에바리스트는 대부분 이런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고질적인 저혈압 덕분에 그의 맹우는 아침에 아주 취약했다. 지금만 보더라도 그랬다. 정신을 못 차려서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라니, 평소 에바리스트의 철두철미한 모습을 아는 사람이 봤다간 클론이라도 되냐면서 경악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뭐, 덕분에 아이자크에게 있어서 참 편한 시간이기도 했다. 어떤 식이냐면 바로 이렇게.
“자, 일어나야지.”
“응…….”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즉 몽롱함에 빠져 있던 에바리스트는 덮여 있던 이불을 걷고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세웠다. 잠이 덜 깼다고 표명하듯 비틀거리는 게 좀 불안해보이긴 했지만 아주 순순한 움직임이었다. 이 상태의 에바리스트는 단순히 일어나라, 손 씻어라, 등의 지시를 내리는 것에 따르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떤 말을 시키든 순종적으로 대답했는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에서는 절대 물러섬이 없던 평소와는 전혀 달랐기에 아이자크는 이런 에바리스트를 볼 때마다 인간이 이렇게 잠에 무력할 수 있냐며 신기해하는 마음 반, 바닥을 치며 웃고 싶은 마음 반인 상태가 되어 그 순간을 만끽했다. 약간 긴 잠옷 소매로 졸린 눈을 부비다가 침대 헤드 위에 올려두었던 안경을 집어 쓰는 에바리스트를 본 아이자크가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옷 갈아입고 나와,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응.”
끝까지 잠결에 젖어 앞으로 일어날 일 따윈 알지도 못하는 몽롱한 목소리에, 아이자크는 자꾸만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은 뒤 태연한 태도로 방문을 닫았다. 아랫층에서부터 올라오는 그것 특유의 냄새가 느껴졌다. 아마 지금쯤 식탁 앞에는 숙련된 솜씨로 파여진 그것을 필두로 그것의 향연이나 다름 없는 상태일 것이다. 에바가 보면 뒤집어지겠군. 아이자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할, 식탁 앞에 선 에바리스트의 표정을 잠시 상상한 뒤 유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낄낄대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하게 5분 뒤, 에바리스트는 애써 무표정을 가장한 채 꼿꼿한 정자세로 서서 식탁을 바라보았다. 넓다란 식탁 위는 꽤 큰 호박 조각 안에 촛불이 들어간 잭-오-랜턴을 필두로 호박 스프와 호박 파이와 호박 케이크와 호박 쿠키와 호박 사탕과 어쨌든 호박으로 만들어졌을 기타 수많은 요리들의 향연이 되어었다. 오늘은 할로윈이 아니라 날 엿 먹이는 날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떠올린 에바리스트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지시자, 나는-”
“말하기 전에 일단 앉아야지, 에바. 안 먹을 거야? 이거 지시자랑 어콜라이트들이 엄청 공들여서 만든 거라고. 안 그래, 지시자?”
“…….”
인형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푼을 든 아이자크가 고개를 까딱여보였다. 매우 얄미운 동작에 에바리스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이것을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천연덕스러운 그 태도에 에바리스트는 글쎄, 저 어콜라이트들이 110cm도 될까 말까 한 저 인형을 주방의 불 앞에 세우는 미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 같다만. 하는 말이 혀 끝에서 맴도는 것을 간신히 참은 뒤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게 다 드러나는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웃고 싶어서 죽겠다는 얼굴을 보니 일단 이 호박 파티는 아이자크가 주최했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아, 하나 더. 내가 호박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모르나보군. 제 앞에 놓인 호박 스프를 내려다보는 에바리스트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식기를 집어들고 숨을 참은 채 스프를 식도로 넘긴 에바리스트가 입 안에서 맴도는 끔찍한 맛을 애써 무시하며 물을 마신 뒤, 차분하다 못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시자.”
“네.”
“오늘 아침을 만드느라 많이 수고한 것 같으니, 저녁은 내게 맡겨줬으면 좋겠다. 대신 재료 하나가 필요한데 구해줄 수 있나?”
“에바 잠깐-”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탁드리죠.”
인형은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희희낙락하던 아이자크의 표정은 급속도로 썩어들었다. 그걸 본 에바리스트가 후후, 하고 소리 내서 웃으며 아이자크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라, 아이자크. 네가 원했던 대로 이건 다 먹을 테니까. 대신 너도 내 요리를 꼭 먹어줬으면 좋겠군. 할 수 있겠지?”
여태껏 지켜 본 웃는 얼굴 중에서 열 손가락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밝게 웃는 얼굴이 그를 향해 깊고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아이자크에게 있어서 그건 그냥 수라의 얼굴이었다. 쥐고 있는 스푼이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에바리스트는 손까지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이자크는 겨우 마른 침을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장난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문득, 어콜라이트에게 잘 말해서 소화에 도움이 되는 식물이라도 얻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