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그.. 신경을 쓰긴 했는데 캐붕과 비문 및 오타가 매우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다음 편은 이 연성이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나면 언젠가 들고 오지 않을까 싶고요.. (ㅋㅋ
“일어났어요?”
눈을 뜨자 하얗게 물든 시야 속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위도, 아래도, 양 옆도 온통 하얀색 투성이었다. 평소보다도 느슨히 풀어진 의식처럼 느릿하게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뜨자, 이번에는 하얀색 속에서 녹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검은색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방금 눈 뜬 모습을 본 것 같은데.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옆으로 길게 늘어진 시야 속에서 신발이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제서야 그는, 아메 서머터지는 자신이 누워있다는 자각조차 없이 바닥에 쓰러져있었음을 깨달았다.
상황 파악도 못하고 늘어진 것도 잠시, 곧 경계심도 없이 태평하게 늘어져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감추지 못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자신의 앞에 반쯤 앉아있던 에브루헨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막 자신을 깨우려고 했던 건지 제 앞에 앉아 손을 뻗고 있던 에브루헨은 그런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순히 손을 거두어들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황에 맞지 않는 여유로움과 태연함이 불쾌하다. 아메 서머터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더듬다가 문득 무언가의 공백을 알아챈다. 펜듈럼. 펜듈럼이 없었다. 무기의 공백에 입술을 사리물던 찰나 위에서부터 여상스러운 목소리가 떨어져내렸다.
“생각보다는 늦게 알아챘네요, 너라면 금방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
“아, 미리 말해두는 건데… ‘그건’ 나도 없으니 아무리 날 싫어하더라도 그런 걸 뒤집어 씌울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내가 한 게 아니니까.”
곧바로 돌아오는 시선에 여보란 듯 양 손을 들어 펜듈럼이 없음을 확인시킨 에브루헨이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늦게 깨어나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주변을 좀 둘러보는 걸 권고할게요. 네가 내 말을 믿을 것 같진 않고… 아무래도 네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얘기가 뭐라도 좀 통하지 않겠어요?”
정보 공유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버림과 동시에 협조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싸늘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협조성이 없으면서도 에브루헨과 엮이기 싫어하는 인물이 바로 그였기에 그 제안은 고스란히 먹혀들어갔고, 따라서 에브루헨의 말은 그러한 특수성에 의해 별다른 반박 없이 묵인되었다. 등을 돌린 채 뭔가를 생각하는 에브루헨을 내버려둔 아메 서머터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본격적으로 순백의 공간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갈 구석이 없다는 결론만 얻게 되었지만.
일단 거리감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회색에 가까운 바닥만이 어렴풋이 바닥이라는 느낌을 줄 뿐, 그 외엔 전부 하얗기 짝이 없으니 당연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것만 같은 무한대의 느낌에 눈살을 찌푸리던 찰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빠른 포기를 종용해온 것은 그 덤이었다.
“아, 맞아요. 설마 네가 그런 단순한 방법을 쓸 것 같진 않지만... 걸어서 탈출해보겠다는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에요. 나도 널 기준으로 두고 얼마든지 해봤으니까.”
…기절한 걸 기준으로 놔두고 실험이나 해봤다는 것을 듣고 나니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헛수고를 사서 할 만큼 시간이 흘러넘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 안은 포기하기로 했다. 아메 서머터지는 제 안에서 치솟는 뭔가를 능숙하게 내리누르며 다른 가능성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 다음, 두 번째.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 일단 펜듈럼이 없으니 당연하게도 개입 종료도, 강신도 불가능한 것에 더해서 투영 역시 불가능했다. 평소에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만들어내던 감각이 이 공간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덧붙여 애초부터 그다지 주특기가 아니긴 했지만 사용할 수는 있는 순환 마법은 아예 사용조차 할 수 없었다. 대기 중에 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깜빡 정신을 잃은 사이에 엘리오스가 아닌 곳으로 날아오기라도 했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가설을 우선 순위에 두기엔 아메 서머터지는 기본적으로 천족이며, 인간의 형태를 취했다고 한들 여전히 인간보다는 정신체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실제로 엘리오스에 내려온 뒤 한 번도 의식을 잃는다고 칭할 수 있는 경험을 해본 적은 없으니 그의 의식을 날려버릴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비록 못 미덥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으며 끔찍하게 싫긴 했지만, 같은 여신의 사명을 받은 에브루헨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런’ 특성을 지닌 천족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이런 공간 속에 갇혀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쓰라린 실패만을 안은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온갖 심각한 가능성들을 점치며 돌아선 아메 서머터지는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에브루헨과 시선을 마주쳤다. 앞서 자신이 했던 모든 삽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것 치고는 여상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과 태도를 접하자마자 저절로 고운 표정이 되지는 않는 걸 보아하니, 허탕을 치고 돌아온 자신을 짜증스럽게 만들기엔 충분한 요소였음이 분명했다. 혹은 그의 모든 게 짜증나기 시작한 수준이었거나.
“구경은 다 했어요?”
“…태평하군요.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가요?”
“열을 낸다고 해서 여길 탈출할 수 있었다면 나도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날뛰었겠지만 그런다고 내보내줄 것 같진 않으니까요. 너, 저거 못 봤어요?”
자칫하면 짜증날 법도 하건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그리 대꾸한 에브루헨은 곧 손가락으로 위 쪽을 가리켰다. 상하좌우 빠짐없이 돌아봤다고 자부할 수 있던 아메 서머터지는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순간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자신이 쓰러져있던 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의 위, 그러니까 천장 부분에 녹색의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나있었다.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말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서로 계기에 해당되는 키워드를 말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은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하. 경악에 찬 짧고 굵은 한탄을 들은 에브루헨이 힐끗 아메 서머터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못 봤었나. 하긴, 봤으면 얼굴부터 굳어서 나한테 저게 뭐냐고 물어봤겠지. 그는 상식 밖의 상황에, 그것도 자신과 단 둘이 처할 때면 모든 일의 근원이 자기라도 되는 양 예민스럽게 구는 경향이 종종 있었으니 아예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아마 그의 첫 번째 반응은 분명 경악일 테고,
“……….”
두 번째이자 곧 마지막은 아마 책임 전가나 혐오 둘 중 하나쯤 되겠지. 아니나다를까,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무시무시한 시선이 곧바로 이 쪽을 향해왔다. 아, 책임 전가는 아니고 혐오 쪽에 더 가깝겠군. 무심하게 생각의 오류를 수정한 에브루헨은 눈보라보다도 더 싸늘한 무표정이 떠오른 얼굴을 태연하게 마주했다.
“저게 무슨 소리에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글자 그대로의 의미잖아요?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말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친절하게 글씨까지 써놓은 걸 보니 목적이 정말 확고한 모양이에요. …뭐, 불행하게도 우린 나갈 수 없을 것 같지만요. 넌 나 싫어하잖아요?”
평소보다 낮게 깔려 집중하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속삭이듯 덧붙인 에브루헨이 시선을 내리깔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내 태평하기 짝이 없던 얼굴에 처음으로 그늘이 깃든 느낌이었다. 엘소드, 걱정할 텐데. 더 낮고 흐리게 흘러나오는 다음 말을 숨처럼 흘려보낸 그가 곧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어두움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평소같은 표정이었다.
“너도 여기서 나가고 싶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별로 통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럼… 일단 거짓말로라도 해볼까요.”
말을 끝맺은 에브루헨은 마치 심호흡을 하듯 숨을 고르게 내뱉더니 이내 뭔가에 집중하듯 인상까지 써가며 아메 서머터지를 천천히 훑어내렸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기라도 하듯 집요한 게, 시선만 놓고 보면 그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죄다 분해해버릴 듯한 기세였다. 참다 참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디지 못한 아메 서머터지가 결국 미간을 좁히며 막 입을 열던 찰나였다.
“이봐요, 너.”
“나는… 네 목소리에 반했던 것 같아요.”
“……뭐라고요?”
“아, 이걸로는 안 되나. 그럼 눈동자? …코? 입술?”
“………….”
“팔. 어깨. 손목. …엄지. 검지. 중지. 약ㅈ-”
“너, 그냥 솔직히 말해요. 나갈 의지가 없죠?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지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반했다느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젠 되는 대로 마구 내뱉는 게 이대로 놔두면 인간들의 신체 부위 하나하나를 죄다 줄줄 읊을 기세다. 인상을 쓴 채 말을 쏘아붙이는 것으로 에브루헨의 말문을 일단 틀어막은 아메 서머터지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멍청함에 울컥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내 긴 한숨과 함께 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 여신이시여. 멍청한 짓을 해놓고도 자기가 대체 뭘 잘못했냐는 얼굴을 하는 저 뻔뻔한 존재가 저와 같은 갈래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제발 꿈에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를 내려보낸 여신 대신 아메 서머터지의 생각에 응답한 것은 에브루헨의 목소리였다.
“말했잖아요, 일단은 거짓말이니까 별로 통할 것 같지는 않다고.”
“그렇다고 그걸 하나하나 부르고 있는 건가요? 한심하군요. 애초에 그딴 걸로 저게 열릴 거란 생각은 대체 어떻게 나온…”
“그럼 이것 외에 좋은 생각이라도 말해보지 그래요?”
답지 않게 싸늘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평소 부드럽게 띄고 있던 표정이 자신의 앞에서 사라지는 것 자체는 꽤 많이 봐왔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애초에 그를 기억에 포함시킬 정도로 신경을 썼던 적은 얼마 되지 않으니 어쩌면 그런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로 그 어리석음에 짜증을 내는 쪽은 자신이었고 짜증을 받아들이는 쪽은 늘 에브루헨이었기에 이렇게 되는 상황은 몇 번이 되더라도….
되더라도?
너, 듣고 있어요? 문득 드는 의문에 아메 서머터지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시선을 옮기자 그는 심지어 약간의 짜증마저 섞인 얼굴로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습관인 건지 뭔지, 입을 다문 채 평정을 잃은 얼굴로 시선을 내리깐 채 신발 코를 바닥에 몇 번 차듯이 두드리던 에브루헨이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잠깐…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민해졌나봐요. 그치만 너도 평소에 나한테 많이 냈으니까, 이번엔 너도 그냥 넘어가주면 좋겠네요.”
“…정말 눈 뜨고 못 봐주겠네요. 창조의 권능조차 반쯤 포기해서 나약한 주제에 정말 어리석은 선택만 골라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파문이 일며 물결처럼 흔들리는 광경에 아메 서머터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에브루헨의 등 뒤로부터, 정확하게는 그 글씨가 쓰여진 그 자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깃펜으로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글씨가… 도형과 숫자가 그려지고 있었다. 느닷없는 효과음에 몸을 돌린 에브루헨의 몸이 일순간 굳었다.
[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말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서로 계기에 해당되는 키워드를 말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은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
●○
1 / 2
“………….”
눈 앞에 드러난 확고한 증거에 너나 할 것 없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로 긴 침묵에 빠져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메 서머터지는 물론이고 에브루헨조차 말을 잃고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에브루헨의 얼굴은 걱정과는 달리 일단 평온한 것에 가까웠으나 아메 서머터지는 그 얼굴을 보면서도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모든 게… 혼란, 그래.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인식이 잘못된 게 아닌가하는 의문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온갖 가능성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결국 머리 안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에 아메 서머터지는 여신에 대한 길고 긴 사죄문을 생각해내며 깊은 탄식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여신이시여, 이럴 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보다 사명을 우선했고 사명을 쫓아왔으며 신의 힘에 모든 것을 바친 제가 고작 저런 것에게, 그것도 인간의 감정을, 애정을 느꼈을 리가 없습니다. 거짓된 마음입니다. 이스마엘이시여, 당신의 조각을 불쌍히 여겨 부디 올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아메 서머터지의 생각 속에서 벌어지는 내적 고뇌였고 겉으로 보여지는 그의 상태는 마치 얼음 조각상이라도 된 듯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하게 얼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따라서 ‘내적 고뇌’ 따위를 알 리 없는 에브루헨은 아메 서머터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은 헛기침을 하며 정적을 깨고는 조용히 시선을 굴리다가, 마찬가지로 깊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도 매너도 아닌 것 같으니 다른 거 다 넘어가고,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제발 입 다물어요.”
“너 계기가 왜 그 따위에요?”
“다물라니까.”
더는 참지 못한 아메 서머터지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의 체온 만큼이나 낮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경고하듯 깊게 깔린 것과 피부를 찌릿거리게 만드는 듯한 분위기가 합쳐진 것은 분명 제법 위협적었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내내 혐오하는 시선을 받았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하던 에브루헨은 평소와 같이 그 경고를 물처럼 흘려내버리고는 곧 망설임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이해해요. 음… 그것보단 놀라운 게 커서. 너에게도 짜증, 혐오, 분노 이외의 감정이란 게 있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거든요.”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에브루헨 아모치온, 여기서 나가는 즉시 나한테 살해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 다물어요.”
“너무 그렇게 겁 먹지 말아요, 사랑에는 종류가 많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당신에게도 그 편린이 있긴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엘소드가 감정 없이 사명만을 위해 나아가는 당신 처지를 동정,”
사각
…했었는데.
깃펜이 사각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에브루헨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치 방금 전의 그를 연상하게 하듯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버린 에브루헨을 대신해 아메 서머터지가 공허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자, 비워진 채로 남아있던 동그라미 하나가 마저 채워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아무 것도 없는 흰 색의 공간으로부터 눈부신 빛과 함께 문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에브루헨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차갑고 싸늘한 시선으로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아메 서머터지는 이윽고 완전히 나타난 문으로부터 빛이 멎어들고 허공에 새겨졌던 글자와 기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지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딱딱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더 할 말이라도?”
“-일단은 여기서 탈출하는 게 좋겠네요. 나가게 되었다니, 참 잘 된 일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몸의 움직임을 제외한다면 굳어있다는 티조차 안 날 만큼 능숙한 어조며 표정이었다. 에브루헨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 얼굴과 미성의 목소리와는 달리 아직까지도 뻣뻣하게 굳은 동작으로 나아간 문의 저 편에는 눈부신 빛과 함께,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아메 서머터지는 문을 닫았다.